둘째, 글로벌 무역질서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미국(G1)이 최혜국대우(MFN) 및 무차별원칙을 준수하려는 경제적 권력과 실행 의지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국제관계 및 국제정치경제학 관점에서 '패권안정이론(Hegemonic Stability Theory)'으로 설명하자면, 하나의 강대(패권)국인 미국이 국제체제를 지배하고 리더십을 행사할 때 무역질서가 안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국제규범과 규칙을 설정하고 공공재를 제공하며, 힘의 우위로 다자간 협력을 조율해 자유무역과 평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할 행위자(헤게모니 국가)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패권국이 부재(쇠퇴)하거나 자유무역 수호 의지가 쇠약해지면, 국제체제는 불안정해지고 분쟁이 증가할 수 있다"는 경고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외교통상 정책의 전개가 주범이라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다자간 규범에 기반한 국제레짐과 패권(힘)의 논리가 충돌하는 속에서 패권국 미국의 정책선택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국제레짐의 분쟁해결절차에 의존해 왔던 무역분쟁(마찰) 상대국들이 자의든 타의든 정글의 법칙, '트럼프 관세게임'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현재 세계경제는 특정 국가의 패권적 지위, 나아가 한 지도자(Player One, P1)의 정치적 아이덴티티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되는 불확실한 상황이 장기화되고 있다. 이로 인해 국제무역의 안정적 운영과 신뢰 구축이라는 WTO의 본래 역할이 크게 훼손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기존 다자주의 협력체계의 재구조화(Rescaling)가 시급함을 극명하게 반영한다.
'패권안전이론'을 도입하자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G2(미중) 체제의 현실조차 인정하지 않고 시장지배 원리를 고수하며, '무역자유화'와 '관세 제로'라는 보편적 원칙을 무시한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처럼 한 명의 지도자(P1)의 독단적 결정이 세계교역질서를 좌우하는 현상을 예방·대비·대책·복구하려면 '리스크 매니지먼트(RM)' 혹은 '안전관리(SM)'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패권'안전'이론(Hegemonic Security-Stability Theory)이란 국제무역질서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강력한 패권국의 존재와 역할이 필수적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다른 국가와 협력해 국제규범을 설계·운영하고 다자 협력을 조율하며 공공재를 제공할 때 자유무역과 글로벌 연대가 원활해지고 분쟁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다."라는 가설이 실현될 수 있도록 조정 혹은 관리해야 한다.
포스트 WTO 시스템을 당장 시작하자
예컨대, 미국이 주도한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체제와 WTO 창설은 안정적 무역환경 조성에 크게 기여했다. 반면 미국이 '자유무역원칙'에서 벗어나 '자국 우선주의' 무역정책을 고수하거나 중국과의 양강(G2) 현실을 외면할 경우, 긴장과 분쟁 위험이 커져 글로벌경제에 막대한 비용을 초래하고 있다. 이미 일부 지도자의 독단적 결정은 국제교역의 예측가능성과 신뢰를 훼손하며 '무역 리스크'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관리하는 것이 '패권안전이론'의 핵심 과제이다.
새로운 '룰 메이커' '트럼프 라운드(TR)'를 기대한다
글로벌 무역질서가 불확실성과 분열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지금, '안전이론'이 경고하는 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먼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고 국제규범을 외면하는 상황을 방관하면 '회복(복구)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뿐이다. 패권국이든 중견국이든 위험을 무릅쓰고 국제규범의 부흥과 다자협력 재건에 나서는 결단이 절실하다. 내친김에 'WTO의 제기능 복원'이나 새로운 '글로벌무역기구(GTO)'의 창설에 미국이 스스로 정책전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겠다.
'안전' 이론이 실효를 거두려면 패권국의 지속적 리더십과 규범 준수, 이해당사국 간 '위험분담(Risk Sharing)' 체계가 필수적이다. WTO 회원국들은 현재의 '레짐(규범)'을 강화하거나, 안정적 무역(공급망) 네트워크 구축에 적극 참여해 국제질서의 균형과 '안전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현실적인 개혁의 한계를 감안하여, "한국이 국제무역 규범의 '게임 체인저'로 나서서, 새로운 '글로벌무역기구(GTO: Global Trade Organization)' 구축을 위한 선도적 역할을 제안한다." 이러한 노력이 국제무역의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한국 등 중견국들이 적극적으로 국제무역 시스템(규범)의 '게임 체인저'로 나서야 할 때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파인(https://www.mediafine.co.kr)에도 실립니다.글쓴이 김영근은 도쿄대학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에서 박사학위(국제관계학 전공)를 취득하고, 현재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교수로 있으며, 사회재난안전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생명정치와 인간의 안전보장’ 등의 논문을 썼으며, 『포스트 제국주의』(공저), 『한일관계사 1965-2015. II: 경제』(공저), 『한일 관계의 긴장과 화해』(편저), 『생명과학기술과 정치』(공저) 등의 저서와 『한일 경제협력자금 100억 달러의 비밀』, 『3·11 동일본대지진을 새로이 검증하다』, 『일본 원자력 정책의 실패』 등의 역서가 있다.
주된 관심분야는 글로벌 위기관리 및 재난·안전학, 일본의 정치경제, 동아시아 국제관계, 국제기구론, 국경학 등이다. 미국 예일대학 국제지역연구센터(YCIAS) 파견연구원, 일본 도쿄대학 특임교수, 학습원대학 객원연구원, 간사이대학 사회안전연구센터 초빙연구원, 아오야마가쿠인대학 국제정치경제학부 협력연구원, 현대경제연구원 동북아연구센터 연구위원, 무역투자연구원(ITI) 무역정책실 연구실장, 계명대학교 국제대학 일본학과 조교수를 역임했다.